2007.3.1... 대간길.. 영취산-깃대봉-육십령 산행기록
무령고개 주차장
약 한달 만에 다시 무령고개를 찾았습니다.
지난 번 구간(복성이재-백운산-영취산) 때는 눈이 엄청내려서 이곳 주차장까지 차량이 오지 못했습니다.
영취산에서 하산하여 도로를 따라 차량이 있는 곳까지 약 30분여를 걸어갔었습니다.
다시 한번 그날 차량봉사하시느라 고생하셨던 이에니님께 감사드립니다. 산행에 앞서 스트레칭을...
오늘은 대간산행 후 처음으로 35분의 산우님들이 참석하셨습니다.
보통 도상거리 평균 20km, 산행시간 약10시간 정도로 구간을 끊어왔던 대간길이 다음 제6구간인 육십령-할미봉-장수덕유산-남덕유산-동업령 구
간의 산행거리 조정을 위해 이번 구간은 도상거리 약 12km 당일산행으로 육십령까지만 갑니다.
평소 관심은 있으나 무박산행과 산행시간에 대한 부담으로 오지 못했던 많은 산우님들이 참여했습니다. 출발 전 기념사진
함께하신 산우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영취산 정상을 향하여...
무령고개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나무계단을 따라 영취산 정상으로 오릅니다.
약 15분이면 영취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취산 정상 오르는 길
영취산 오르는 가파른 길에는 이렇게 나무계단이 만들어 져 있습니다.
영취산 정상
약 15분 후 영취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많은 산객들이 찾았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약 한달여만에 지난 번 하얀 눈속에서 이곳을 찾아 남겨두었던 평산모 백두대간 리본을 찾아봅니다. 백운산에서 영취산 정상올라오는 길
백운산방향에서 영취산 정상 올라오는 길입니다.
지난 번 무릎까지 쌓여있는 눈속을 헤치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날의 기억이 잠시 나는 군요. 산죽이 피어있는 길
영취산에서 이제 깃대봉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영취산을 내려우는 길..
산죽이 늘어서서 우리를 반깁니다.
아직도 곳곳에 얼음이 얼어 있어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산죽길을 지나서
앞선 산우가 산죽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영취산부터 깃대봉을 지날 때까지 이곳은 산죽천지입니다. 대진산성
영취산을 출발해서 약 30분여가 지나니 대진산성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논개생가/육십령/영취산 세방향 갈림길이 있는 곳입니다. 지나온 대간길
지나 온 대간길을 되돌아 봅니다.
저 멀리 백운산이 보이는 군요.
지리산 청황봉을 시작으로 성삼재까지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온 대간길은 전라도 운봉땅에서 바닦을 치고 서서히 다시 고도를 높여 백운산, 영취산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남덕유에서 용솟음치기 위해 육십령까지 숨을 고르는 구간이 이번 구간입니다. 깃대봉 가는 길
앞으로 가야할 대간능선의 아름다운 곡선입니다. 3월에는 철쭉이 만개할 것 같습니다.
산죽길 그리고 간간이 나타나는 억새길 그리고 철쭉길까지...
아마도 4월, 5월이면 이곳도 봉화산처럼 아름다운 철쭉이 만개할 것 같습니다. 논개가 태어난 마을
깃대봉 가는 길에 내려다본 논개가 태어난 대곡리 그리고 저수지입니다.
본래 논개생가터는 저 윗쪽 대곡저수지 쪽이었습니다만 저수지로 인하여 그 아래로 옮겨 만들어 놓았답니다. 키큰 산죽터널
영취산을 막 내려와서는 키 작은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더니 고도가 더 낮아져서인가 이제부터는 키큰 산죽터널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백운산 정상석
백운산 정상에 서 있는 정상석의 모습.
백두대간 마루금에 우뚝 서 있는 1200m가 넘는 산의 정상석 치고 너무 자그마하고 초라하기만 한데...
백운산
- 안명수 글
미끼골 묵계암 지나 가파른 암벽길
전북 경남 경계선 그림 같은 삼각산
상련대(上蓮臺)
단애 위 암자
백운산 명승지다
학승(學僧) 같은 중년 스님 경내를 거닐다가
저 멀리 지리산에 눈길을 멈추었다
천왕봉
봄빛에 겨워
가부좌를 틀었다
중봉에 올라서니 고도감(高度感) 대단하다
정상 능선 뒤로 두고 백운사로 향하다.
하산길
거대한 협곡
물소리 요란하다 백운산 정상에 있는 조망안내도
초라한 정상석을 대신함인가???
백운산 조망안내도가 준비되어 있다.
날씨만 좋으면 이곳에서는 지리산 주능선과 낙남정맥 장안산 그리고 남덕유산 등의 조망이 다 보이는 곳이다.
▲ 백운산(白雲山山 1278.6m)
백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그 중에서"흰구름 산"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산이 바로 함양의 백운이다.
높이도 1,000m가 훨씬 넘는 준봉인데다 산정에서의 조망도 으뜸이다.
남도의 내노라하는 명산들이 동서남북 어떤 방향에서든 거칠 것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남쪽에 하늘금을 그은 지리산의 파노라마는 그리움의 경지를 넘어 차라리 연민이다.
반야봉의 자태는 너무 뚜렷해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북쪽 끄트머리에는 넉넉한 덕유산이 태평스레 앉아 있고 그 너머에 황석, 기망, 월봉산이 줄기를 뻗대고 있다.
금원 기백도 가까이 보이고 동북 방향 멀리로는 수도,가야,황매산도 가물거린다.
양쪽날개인양 백운산과 맥을 같이한 동쪽의 갓걸이산(괘관산)과 가을 억새가 멋진 장수군의 장안산이 서쪽에서 마주보고 있다.
이렇듯 백운산은 명산에 둘러싸여 명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지방 최고의 진산이다.
겹겹이 둘러싼 능파들 사이사이로 흰구름이 부리는 조화는 백운산만이 연출해 낼 수 있는 활동사진.
산세 또한 전형적인 육산이기에 사계절 내내 산행이 가능한 것이 이 산의 매력이다.
부산에서 백운산을 찾을 경우 승용차를 이용한 원점회귀산행과 대중교통을 이용한 종단산행 2가지 코스가 있다.
원점회귀산행은 미끼골~상련대~정상~큰골~백운암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약 6시간이 소요되며 종단산행은 중재~정상~미끼골로 이어지는 코스로 약
5시간이 걸린다.
상련대를 거치는 코스가 일반적이긴 해도 상련대까지의 도로길과 상련대에서 정상까지의 급경사길이 상당한 체력소모를 요구한다.
따라서 백운산의 겉과 속을 함께 접할 수 있는"중재~정상"길을 소개한다.
산행들머리는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부락이다.
함양에서 하루 세 번 운행하는 노선버스는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되레 마음이 편하다.
중기마을 입구에서 하차하여 서쪽으로 나 있는 산간도로로 접어든다.
여기서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지나 40분 가량 걸어 올라가면 중재에 닿는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마을의 흔적이 거의 없고 산비탈에 빈집 한 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중재는 근래들어 백두대간 구간종주의 주요 지점으로 널리 알려진 고개이다.
백운산은 고개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올라선다.
중재에서 정상까지는 약 2시간 거리. 길목마다 백두대간 표시기가 무수히 달려 있어 그대로 따르면 길잃을 염려는 없다.
전라.경상을 가르는 백운산 서북릉 길은 대체로 완만하다.
중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산행 들머리인 중기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이곳이 중고개재다.
고개넘어 서쪽의 지지리부락은 전북 장수군의 가장 오지마을이다.
중고개재에서부터 등로는 서서히 고도를 올리다가 정상 직전의 오르막에서 급경사를 이룬다.무덤 2기가 있는 이곳을 정상으로 착각하기 쉽다.
무덤에서 정상은 북쪽으로 왕복 10분거리.헬기장을 지나면 곧 백운산 정상이고 흰 팻말이 서 있다.
하산을 위해 무덤으로 되돌아와서 동쪽으로 내려선다.
상봉에서 10분이면 도착되는 중봉은 백운산 최고의 전망대다.
중봉과 어깨를 같이한 하봉에는 장터의 흔적이 있으며 이곳에서 40분 거리의 상련대까지는 급경사 내리막이다.
내리막길에서 두번째 만나는 무덤에서 길이 두 갈래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따라야 상련대를 거칠 수 있으며 왼쪽길은 능선으로 해서 묵계암에 이르는 길이다.
미끼골 위쪽에 있는 상련대는 적막이 흐르는 선원이다.
상련대 왼쪽 계단길을 내려서면 바로 산간도로이며 길은 하산을 마감하는 운산리 대방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중간에 비구니 두분이 암자를 지키는 묵계암이 있어 쉬어갈 수 있다.
묵계암은 우리나라 유일의 절마당에 무덤이 있는 곳. 스님은 이곳이 천하 제1의 명당이라고 자랑한다.
길손에게 솔잎차를 대접하는 절 인심이 암자를 가득 채운 한련꽃 향기 만큼 아름답다.
묵계암까지 승용차가 올라오며 함양행 버스가 다니는 대방리까지는 걸어서 약 50분이 걸린다.
버스는 오후 7시40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함양까지 소요시간은 30분 정도.묵계암에서 택시를 부를 수 있다. 요금은 1만5천원.
[부산일보] 1998/08/ 류정자. 산우리산악회 총무/(발췌:한국의 산하) 영취산 가는길에 되돌아본 백운산 원경
지나온 백운산의 모습...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영취산을 가기 위해서는 암봉과 1066봉을 넘어야 한다.
암봉가는 길에 되돌아본 백운산의 모습이다. 영취산 가는길에 만난 산죽터널
봉화산에서 백운산가는 길은 온통 철쭉밭이더니 백운산에서 영취산 가는 길에는 산죽터널이다.
키가 크고 울창한 산죽터널이 시야를 가리고 등산로에 삐져나온 잘린 나무가지에 발이 자꾸 걸린다.
산죽밭에서 산우들이 잠시 포즈를 취했다.
산죽
- 글 정삼희
굽이치는 능선이 그리울 땐
꽃도 피우지 못할 서러움
달빛 시린밤
이름 모를 들꽃이 되어
속살 부비다가
장당 옥류 푸른 물에
진달래 산수유
몇 송이로 떠내려와
시가 되고 눈물이 되고..
한밤 치근대는
비로 내린다. 선바위고개이정표
백운산을 출발한지 약 1시간만에 선바위고개 이정표에 도착했다. 여기서 영취산 까지는 400m, 무령고개는 700m. 영취산 올라가는 등산로에 피어난 설화
온천지에 설화가 피어있다.
선바위고개에서 영취산 정상가는 등산로에 피어 있는 설화 속을 산우들이 지나고 있다. 여기서 영취산 정상까지는 이제 불과 400m 영취산 정상
영취산 정상이다.
오늘 산행의 종점 영취산 정상. 정상 한켠에는 무수이 많은 산객들이 그들의 흔적을 이렇게 남겨놓았다.
여행강타님에게서 평산모 대간리본을 하나 받아 육십령방향으로 가장 오른편에 우리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백두대간 안내도
영취산 정상에는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백두대간 안내도를 만들어 놓았다.
■ 영취산(1,076m)
무령고개는 금남호남정맥에 속한다.
영취산에서 갈리어 나간 금남호남정맥은 무령고개, 장안산(長安山, 1,237m)을 거쳐 장수 팔공산(八公山, 1,151m)을 지나 진안 주화산에서 호남정맥
과 금남정맥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내달은 호남정맥은 내장, 추월, 무등, 사자산을 거쳐 광양 백운산에서 기세를 다하고, 북으로 뻗은 금남정맥은 대둔, 계룡산
을 거쳐 부여 부소산에서 그 끝을 맺는다.[출처:조선일보사]
다음 제5구간 들머리 모습
다음 구간 영취산-깃대봉-육십령 구간의 들머리를 대간 리본들이 알려주고 있다.
다음 구간은 약12km정도의 평범한 구간이다.
제6구간을 접속구간 등을 고려하여 육십령에서 동업령까지 진행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당일로 진행할 계획이다. 영취산 정상
정상에서 함께한 산우님들이 산행을 마무리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무릎까지 빠지는 대간 능선을 10시간 이상이나 헤쳐온 후라 피곤 할 법도 한데...
얼굴에는 무언가 이루워낸 자신감들로 가득 차 있다.
이곳은 행정구역 상으로는 전라북도 장수군이며 무령고개로 하산하면 충절의 여인 논개 생가가 있는 주촌리이다.
논개의 고향 장수군
빗물이 금강과 섬진강으로 갈리는 수분재(水分嶺 539m)가 있는 장수는 사과가 유명하고, '의암사'(義巖祠)를 찾아가면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격전
으로 꼽히는 진주성 싸움에서 이제 갓 피기 시작한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순절한 의기(義妓) 논개의 영정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잘 알다시피, '주논개(朱論介 1574~1593)는 장수 태생으로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일찍이 마을 훈장이었던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와 함께 살다가, 작은 아버지가 돈을 받고 김풍헌의 백치 아들에게 민며느리로 팔아 넘겼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완강하게 반대를 하자 김풍헌은 장수현감에게 소장을 올렸고, 우여곡절 끝에 방면이 된 모녀는 관아에 머물면서 당시
최경회(崔慶會) 장수현감과 논개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수현감 최경회는 이듬해 사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되어 진주(晋州)로 부임할 때 논개
도 간청하여 따라갔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만명의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 학살당하며 성(城)이 함락되었고, 평생을 의지하려던
최경회 부군(夫君) 역시 전사하였다.
이어 칠월칠석날 왜적들이 촉석루에서 승전 술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논개는 기생으로 왜장을 유인하여 촉석루 아래 바위 절벽에서 그를 단단히
껴안고 (열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웠다고 함) 넘실대는 남강(南江) 푸른 물 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훗날 그녀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어 그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최경회와 논개의 묘는 배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 마을 뒷산에 있는데 이들 부부의 묘가 여기에
있게 된 사연은 이렇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장수 지역 의병들은 남강 하류를 수색해 창원 지수목에서 최경회, 그리고 왜장을 껴 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부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주씨 문중과 장사지낼 것을 상의했지만, 왜적의 추적과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은 이를 거절하였다.
또 기생이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이들은 백두대간 동쪽의 삼남대로변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아 장사 지내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의병의 후손들에 의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던 이 묘는 20여년 전인 1975년 세상에 알려졌다, 순절한 후 382년만의 일이다.
[출처:백두대간한마당, 조선일보]
무령고개로 하산하는 길에...
영취산 정상에서 무령고개 주차장까지는 약 400m.
하산하는 길에 장수군에서 설치한 듯한 나무계단에서 다시 한번 자리를 함께 하였다.
눈보라가 거세게 부는 것이 내심 귀경길이 걱정된다.
버스가 무령고개까지 올라오지 못해 우리는 다시 무령고개에서 버스가 있는 고개초입까지 도보로 걸어가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였다.
■ 무룡고개
무룡고개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금남호남정맥이 막 시작하는 용머리 부분을 타고 넘는다.
무룡고개에 서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 첩첩이 겹쳐지는 산과 산 뒤에서 펼쳐지는 지리산 연봉은 그대로 하늘벽이다.
붉은 노을에도 늘 검푸른 모습, 그 장엄한 풍광은 그 너머에 신선계가 있다는 말을 선선히 믿게 하기에 충분하다.
왼쪽으로는 그 지리산을 향해 달려가는 백두대간의 넉넉한 행진이 수억겁의 세월을 품은 채 오늘도 계속된다.
백운산 중재 월경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맞은편 금남호남정맥의 첫머리 장안산의 능선은 또 얼마나 호쾌한가.
‘춤추는 용’이란 뜻을 가진 무룡(舞龍)은 능선과 계곡을 번갈아 타며 고개를 오르는 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수군지>는 장안산을 백두대간의 8대 종산이자 지리산에 앞서는 호남의 진산이라고 적고 있다.
금남호남정맥이 시작되는 산을 영취산이라고 부르며 백두대간의 봉우리로 여기고, 장안산을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맥을 잇는 산으로 떼어내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잘못이라 한다.
고개를 기준으로 산을 가르는 관습이 빚어낸 오류일 것이다.
영취산은 장안산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용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금남호남정맥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 [출처 : 백두대간한마당]
여기서 애틋한 사랑이야기 하나
백두대간과 장안산이 만들어낸 길디긴 지지계곡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마을을 소개시켰을 정도로 빨치산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 계곡에 여성 빨치산과 토벌대로 나선 국방군 대위의 애틋한 사랑이 전한다.
51년이 끝나가는 12월, 토벌대로 나선 백(白)야전전투사령부 26연대 선봉 중대장인 김 대위는 장안산을 포위하고 있었다.
곱게 쪽진 여인의 머리에 난 가리마 같은 무룡고개를 오르는 옛길에서 김 대위는 오양수라는 여성 빨치산을 만나게 된다.
김 대위 나이 24살이었고 오씨는 20살 꽃다운 나이였다.
오씨는 오랜 도피생활 끝에 선을 놓치고 낙오한 채 눈밭에 쓰러져 있다가 김 대위에게 발견됐다.
김 대위는 오씨를 안아 일으키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늘 그렇듯이 이들의 사랑도 그렇게 운명적으로 찾아왔다.
씻지 못한 얼굴, 다 찢어진 옷,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 오른 손발…. 여성으로 보기 어려운 몰골이지만 김 대위는 직녀를 만난 견우였다.
김 대위는 오씨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부하들에게도 오씨를 자신의 아내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오씨도 김 대위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김 대위는 오씨가 건강을 회복하자 군인가족증을 만들어주고 목포에 있는 자신의 고향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김 대위는 방첩대에 체포된다. 빨치산을 빼돌린 것이 죄목이다.
김 대위의 사상을 의심한 방첩대의 심문은 지독했다. 시부모가 될 어른들을 모시던 오씨 역시 체포됐다. [출처 : 백두대간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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