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별을 보여 드립니다 (낙동정맥 9차, 황장재..대둔산..먹구등..느지미재..왕거암..갓바위전망대..주산재..별바위..통천문..피나무재)
별을 보여 드립니다.
낙동정맥 9차
일시;2010.5.9.(3:00---14:20)
구간; 황장재..대둔산..먹구등..느지미재..왕거암..
갓바위전망대..주산재..별바위..통천문..피나무재 24.1km
참가인원;43명
도심에도 근교에도 연두색 나뭇잎이 봄 바람에 하늘 거린다.
비바람에 강풍까지 변덕을 부리더니 1주일 사이에 들과 산이 연두색으로 기초 화장을 마치고 산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답답한 도회를 떠나 산으로 향하고 픈 마음이 환장할 지경에 이른다.
오늘 구간은 청송 주왕산을 둘러싼 외곽 능선을 잇는 다소 먼 구간이다.
안동을 지나고 가랫재 휴게소에서 잠시 새벽 공기를 쐬고 나서 황장재에 내려 놓는다(2:37)
넓직한 고개 마루에서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하나 둘씩 오른다.(3:00)
음력 3월 26일, 그믐달이 동쪽 하늘에 걸려있고
어둠속에서도 느낄 정도로 파란 나뭇잎에서 나오는 상큼한 냄새가 향기롭다.
황장재 고개마루 전신주 뒤에 조그만 하게 숨어있는 수준점을 발견하고 잠시 들여다 본다.(메모 2.)
등로는 흙길, 높낮이는 새벽 산행에 적절한 고도를 이룬다.
봉분이 나지막한 묘 1기가 우측 경사면에 잠들어 있다(3:10)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나무 기둥에 지나온 황장재(1km)와 가야할 먹구등(7.9km) 표시가 붙은 첫번째
이정목이 반긴다.(3:15)
비탈길 옆, 안동 권씨 묘지앞을 지나고(3:30) 내리막길 끝 지점 안부, 갈평재에서 두번째 이정목을 만난다.
이정목 옆에는 통나무를 절반 잘라서 뒤집어 놓은 벤치가 놓여있고 안부에서 내려다 보는 좌측 골짜기
아래로 붉은 불빛이 명멸한다.
위치상으로 지품면, 지품리의 대흥사 뒷 능선을 지나고 있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부엉이 한마리가 이리 저리 울면서 날아 다닌다.
태백산님 설명에 의하면 산란기가 되어서 암수를 찾아 다니는 “애절한 울음”이라고 한다.
남들은 단잠을 자고 있는데, 유독 부엉이는 밤에 돌아 다닐 운명을 지녀서 참으로 고달프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남들이 단잠에 빠져 있을 이 시간에 새벽 산행을 하는 내 신세와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피식 웃는다.
간단한 휴식을 취하면서 물을 들이키고 과자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세번째 이정목에 표시된 거리, 출발 지점 황장재 3.1km, 먹구등 5.2km표시를 보고 50분 만에 3.1km를
주파한 내 속도에 스스로 놀란다.(3:50)
산 비탈을 깍아서 평탄하게 터를 다듬고 그 위에 비닐을 깔아놓은 지점,
지도에 표시된 송이 모듬터를 스친다.(4:05)
비탈길을 오르면서 네번째 이정목을 만난다.
황장재부터 길동무를 하던 이정표는 이후 볼 수가 없고 고르지 못한 오르막 등로,
낙옆으로 미끄러운 등로에서 땀을 흠뻑 흘리면서 가뿐 숨을 몰아 쉰다. (4:15)
한 무리의 일행이 앞서거니 뒤 서거니 하다가 넓직한 정상에서 봉분이 매우 큰 묘 2기를 만난다.(4:25)
주변의 잡목과 넝쿨들을 깨끝이 정리하여 전망이 툭 트이는 곳이지만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아
시야는 흐리다.
봉분을 지나서 한적한 숲길로 이어지는 평탄한 능선에 오르니 국립공원 경계석이 세워져 있고
출입 경고 표지판도 서있다(4:35)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넓다란 묘지앞에 베낭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아주 크게 자리한 경주 최씨 묘지를 뒤로 하고 정맥에서 살짝 벗어나 지근 거리에 있는대둔산(905m)을
다녀온다. 정상은 다소 밋밋하다.
오고 가는 길은 갈참나무 잎이 수북히 쌓여 발이 미끄럽다.
황장재가 366m 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능선을 오를 거라고 생각 하였는데 이 지점까지 이외로(?)
쉽게 올라온 기분이다.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속에서 묘지를 뒤로하고 계곡 아래를 응시한다.
저수지인듯 반사되는 희미한 물체를 느끼면서 내려서는 길은 갈참나무 잎으로 뒤 덮힌 미끄럽다.
잡목이 성가시게 하다가 약간의 너덜지대로 이어진다.
능선으로 오르면서 아침이 서서히 걷히고 사물이 제대로 된 형상을 보여준다.
연 이어서 묘 2기를 지나고 평탄하고 넓직한 비탈길을 만난다.
돌담을 쌓은 것 같이 한동안 이어지고, 넝쿨 식물과 굵은 참나무가 서 있는 형상이 화전민 터인지
아니면 지도에 표시 된 것같이 집터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내려서는 길에 성남정맥님이 낙옆을 뒤지고 더덕을 3뿌리나 케고도 더 찾을 욕심인지
연신 숲속을 뒤지고 있을 즈음 암릉 바위에서 끼어있는 석문 같은 묘한 형상의 바위를 만난다.
이러한 특이한 모습의 바위는 한동안 이어진다.
소나무 아래에 베낭을 풀고 마중물님이 건내는 호박을 한 입 베어문다.
물기가 베여서 바짝 마른 입에 달콤하다.
안부로 내려선다, 아름드리 참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넓직한 옛길 자취가 있는 걸로 봐서나
시간상으로나 두 고개로 판단이 되는 지점이다.
갑자기 감사님이 “전투모드”를 하고 람보 2 같은 사나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노획물을 수거하기 위한 자루를 들고 번득이는 눈 빛이 예사롭지 않다.
능선을 거닐면서도 계곡에 자라는 두릅나무를 귀신 같이 발견하고 쏜살같이 내려선다.
가히 천리안이요, 날랜 범虎 같은 동작이다.
그리고는 능선에 서있는 일행마져 불러 내리더니 한 동안 올라오지 않는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독수리가 주먹만한 토끼를 발견하고 내리 꼽는 동작,
숲 속에 떨어지는 바늘소리도 감지 한다는 순록의 귀를 가졌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저런 눈과 귀로 감사라는 직책을 맡았으니 산악회가 연신 흑자가 나는 지도 모른다.
등로는 서서히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갈참나무 잎이 수북히 쌓여 카펫을 걷는 기분이다.
몇차례 가뿐 숨을 몰아 쉬고 나서 잡목으로 둘러 쌓인 능선 먹구등에 도착한다.(6:30)
황장재를 출발하고 7.9km를 3시간 30분에 도착한, 모범적인 속도로 산행을 한 것이다.
잡목에 쌓인 정상은 평탄하기 그지 없다.
산정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고 금은광이에서 올라오는 길이 정상에서 서로 만난다.
달기 폭포로 내려가는 계곡에 있는 동리 이름이 너구동인걸로 봐서 음변이 되어서 넉구등으로 불리운
것이 아닌른지 혼자서 추측해 본다.
두개의 낮은 능선을 지나고 안부 직전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6:35)
시골에 가서 가지고 온 두릅을 안주삼아 오미자 술을 한잔씩 권한다.
지성인에게 주문한 오미자를 담궈서 즙을 만들고 나서 소주(19도)를 부어넣고 솔잎을 따서 재여 놓으니
향과 맛, 알콜 도수가 적절히 어우러져 그만이다.
오늘은 각자 가져온 밥과 반찬으로 즐겁게 식사를 마친 탓인지 30분 만에 식사를 완료하고 출발 채비를
한다.(7:00)
소나무가 준비한 냉 커피로 마무리를 하는데 마중물 선생님이 한마디 한다.
소나무, 당신도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른이 아닌가,.
어른이 식사를 하는데 마른 반찬 한 가지로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
집 사람에게 좀더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져보게나,
다음 산행에서는 3가지 반찬을 준비해 줄 수 있도록 노력(?)를 하란 말씀이야…
………….???......’’’
금요일에 노력 하지 말고, 목요일에 하면 여러 가지로 유익 할 것이야…
낄낄 거리면서 듣는 소나무도, 같이 듣는 동료들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범인凡人 셋만 모여도 스승이 있다는데 진짜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구구절절 옳을 수밖에…
우리가 식사하던 곳에서 지근 거리에 후미팀과 다른 일행이 함께 식사를 한다.
등산 조아님과 용인 참석자들이 같이 한다.
원래 이 팀은 준족이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후미와 어울려서 식사를 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다.
우리가 식사 도중에, 후미가 지나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초흔님이 혼자서 콩죽 같은 땀을 흐리면서
지나간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권해도 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지나친다.
오늘은 다소 힘이 들어 보인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아니하고 왜 혼자서 지나 칠까…..?
(이 때의 우려가 종착지 피나무재서 사실로 나타났다. 가장 후미에서 도착한 것이다.)
올라서는 능선은 철쭉 나무로 빼곡하다,
뒤를 돌아봐도 나무 가지에 가려서 전망이 전혀 없다.
지도상으로는 명동재라고 표기 되어있으나 그 많던 꼬리표도 이정목도 없다.
이곳에서도 10여명의 일행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채비를 한다.
이어서 만나는 두 번째 헬기장에 도착하니 주변에서 두릅을 발견하고 한 무리가 흩어져 있다(7:25).
능선을 따라 가면서 조망을 해 보아도 영 시원찮다.
지나온 먹구등 봉우리를 찍으려고 바위에 올라서서 셔터를 누르지만 나무 가지에 가린 조망이
썩 내키지 않는다.
지나온 먹구등 정상은 주먹만 하게 보일뿐이고, 주변은 짙은 숲에 기려서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능선 좌우 계곡에 숨어있는 보물이라도 발견 할 셈인지 하나 둘씩 흩어져서 보물 찾기(?)를 한다.
성남정맥님이 두어 뿌리를 더 채취해야 두릅주를 만들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낙옆속을 뒤진다. 태백산님께 산나물 공부를 하면서 내려 오다가 넓직한 안부, 느지미재에 도착한다(7:45)
좌측 계곡 지품면 송천리 상먹동에서 주왕산 내원동으로 통하는 길이다.
상먹동에서 올라오는 길이 가파르고 험 하여 이곳에서 출발하면 느지막히 내원동에 도착하는 고개,
그래서 느지미재라고 불렸다고 한다.
안부를 지나고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데, 앞서가던 일행도 베낭을 등로에 벗어두고 이리 저리로
보물 찾기를 한다.
갈참나무에서 진달래로, 그리고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동안 이어진다.
햇살에, 오르막에 땀이 머리에서 목으로, 등으로 베여든다.
폐묘 같은 흙무덤이 길 중앙에 있고 그곳을 피해 정상에 오르니 먼저 도착한 일행이 베낭을 벗어두고
왕거암을 향해 오르고 있다. .(왕거암 3거리,8:10)
왕거암은 정맥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능선위에 자리 잡고있다.
평탄한 정상이지만 왕거암(907m)은 주왕산군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8:20)
정상은 헬기장이 있으나 주변은 온통 싸리나무, 두릅나무, 잡목으로 뒤 엉켜있고
나무들로 인해서 시야는 거의 없지만 갈참나무 사이로 가메봉이 살짝 드러난다.
정상에 설치된 삼각점은 오랜만에 보는 1등급 삼각점이다.
왕거암 갈림길로 돌아오니 성남정맥님이 아침에 채취한 더덕을 술병에 넣어서 급조한 더덕주를 한잔씩
건네고 있다. 더덕의 알싸한 향기가 코 끝을 스친다.
내려서는 내리막길 좌측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고
계곡이 끝나는 산 자락 지품면 용덕리, 절골 사이로 비집고 들어앉은 밭은 손바닥 만하다.
산 자락을 돌고 돌아 이어지는 길, 암록색 숲속 골짜기에 들어 앉은 밭이 그림같다.
지능선을 넘으면 달산면 인곡리로 가는 산자락이고 손바닥만한 계곡이 들어앉아 있다.
이곳이 고향인 쑥맥 대장의 애절한 이야기가 실타래를 풀듯이 술술 이어진다.
사촌누나가 시집을 가고 보니 신랑은 장남, 손바닥 만한 하늘이 보이는
깊은 산골이어서 백부가 돌아 앉아 소리없이 울었다고 한다.
척박한 산비탈을 일궈서 고추 3,000근을 수확하고 담배 농사를 해서 5남매를 전부
대학을 졸업시켰다고 한다.
담배농사와 과수원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절대로 그런 집에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촌부들은 한결같이 이야기 한다.
이따금 산돼지가 잡히면 고기를 가져다 먹으라고 전화를 하면 그 정성에 고마워서
밤길을 달려서 오곤 했었다 한다.
오늘, 이 길을 지나는 줄 알면 집에 들르지 아니하고 갔다고 서운해 하실 거라면서
남다른 감회가 얼굴에 베어 나온다.
형편이 나아져서 살아갈만 하면 온몸이 아프고 무릎이 성하지 아니하여 걸음조차 어려운
몸, 외동 아들인 쑥맥의 입장에서는 사촌 누나가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을까…….
모진 환경에서 끈질기게 살아온 우리 삶의 자화상이다.
그도, 우리도 세월의 깊이가 얼굴에 가득하다………….
우측은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빼곡한 능선이고 그 아래는 갈전으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계곡은 깊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도 어려워 보인다.
나무에 가려서 답답하던 조망이 작은 바위 둔덕에서 툭 트인다.
일행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채근하는 발걸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 산 비탈을 뒤덮은 연두색 나무잎이 초록 융단을 깔아 놓은듯 하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던 말이 절절이 와 닫는다.
작은 오름이 이어 지다가 떡 시루 같은 모양의 바위를 만나고, 그사이로 좁은 등로가 이어진다.
좌측 바위 아래는 평상을 깔아 놓은 듯, 5-6명이자리하고 누워도 충분 할 정도로
평탄하고 넓직한 바위가 있다.
제단바위라고 이름이 붙여 졌지만, 내 생각에는 바위 아래서 비박을 하기에 안성 맞춤이다.
5-6명이 쏱아지는 비도 피할 정도로 크고 기묘한 형상이다.
능선에 오르니 짙은 갈색 나무줄기 사이로 펼쳐진 파란 초원과 연두색 나뭇잎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산행에서 솟아나는 엔도르핀이 확 퍼지는 짜릿한 기분이다.
앞선 일행을 불러 세우고 함빡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초원이 끝나는 좌측에는 기가 막힌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갓 바위 전망대;9:20)
뚝 떨어지는 능선 중간에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갓 같다고 하여 이름도 갓바위이다.
붉게 핀 산 벗꽃이 철 늦게 활짝 피었고 능선 좌우로 지품면과 달산면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아름답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솟구치는 능선, 암록색 산군의 연속이다바라보는 전망에 취해서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갓 바위
넓게 펼쳐진 초원이 끝나는 지점 3거리에는 청련사로 향하는 길을 나무를 가로 막아서 등로는 우측으로
살짝 휘어진다.
겨울 산행때 고생을 하던 솔바람님이 최근에는 매우 잘 걷는다.
표정도 밝고 컨디션도 매우 좋아 보인다.
울릉도에 다녀온 이후 정기를 받아서인지 선두대열에서 잘도 가시는 군요.
성인봉에 다녀 와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붙은 것 같습니다..
산마늘이 유명 하던데 구해 오셨나요
산에서 채취도 가능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 수단 중 하나라서 1kg에 15,000원을 주고 구입해 왔지요
식품 코너에서 100g에 5000원에 판매 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 좋은 가격 이군요.
청계산 다람쥐님 아들도 같이 갔더군요. 똘똘하게 생겼던데….
그러게요. 그 놈이 재롱을 많이 부려서 즐거웠습니다.
안부를 지나자 말자 하얀 밧줄이 좌측 비탈길을 막아 놓았다.
이어지는 오르막길에서는 또 한번 인내력을 시험한다.
마지막 숨을 토하고 나서야 하얀 시멘트 헬기장(798m)에 도착한다.(9:55)
갈참나무가 등산화를 훌쩍 덮는 등로를 따라 내려 서다가 바위 위에서 드러 눕는다.
피곤과 땀이 뒤 썩여 하늘을 향해 큰 대자로 드러누워서 보니 일행도 저만치서 휴식을 취한다.
연분홍 진달래 꽃이 드문드문 피어서 초록숲과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 내리막, 길 옆에 잠들어있는
정부인경주 김씨의 묘를 지나고(10:10)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내려서서 돌무더기가 쌓인 안부에 도착한다(10:20)
배슈막 그룹이 간식을 잔뜩 꺼내놓고 원기를 돋우는 술을 한잔씩 돌린다.
청계산 다람쥐님이 지난번처럼 떡을 두팩을 꺼내서 나누어 먹는다.
한동안 누워서 휴식을 흠뻑 취한다.
간식과 휴식을 겸한 탓인지 다시 출발하는 발 걸음이 가볍다(10:50)
비탈길을 살짝 돌아서니 등로 옆에 崇政大夫 行同知仲樞府事 청송심씨지묘라고 쓴 비석과
문인석이 반긴다. (10:55)
봉분은 오래된 탓인지 형상이 거의 없고 오랜 세월을 지난 탓인지 문인석에도 세월의 흔적이 많이
쌓인 모습이다.
숭정대부는 조선시대 종 1품下의 문무관 품계로서 의정부 좌.우찬성, 의금부,중추원판사의 직급이며
중추부(中樞府)는 조선 시대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으로서,
동지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종2품 벼슬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관직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청송 심씨의 위세를 또 한번 실감할 수 있는 매우 고위직의 무덤/비석을 정맥길에서 만난다.
산 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에 이번에는 마사토로 뒤 덮혀서 잔디가 거의 없는 묘지,
경주이씨묘를 지난다(11:00)
능선 좌측으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귓전을 간지럽힌다.
땀이 흐르다가 살짝 마르곤 한다.
가파른 능선 비탈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엄나무 잎, 피마자 잎 같은 엄나무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가지와 파란 잎이 각각 효능과 맛이 대단하다고 온통 난리다.
엄(음)나무는 두릅과에 속하며 가지에는 가시가 있고 껍질은 약용으로 사용하며
뿌리와 어린잎은 식용한다. 농촌에서는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엄나무의 가지를
대문 위에 꽂아 둔다. 지방에 따라서는 개두릅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나무 때문에 가다가 서다가 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마치 정교하게 쪼갠 돌로 쌓은듯한 낮은 돌담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곧 정상에 도착한 후
다시 내리막 길이다.
신술리로 내려가는 안부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오미자 술을 한잔하고 성남정맥님 일행이 건내는 안주를 한입 털어 넣는다.
그런데 나눠 먹는 안주가 입이 쩍 벌어진다.
전복, 아스파라가스에 버섯을 버무러서…..
내조가 이 정도라면 대간.정맥을 하면서 얼마나 신이 날까….?
그 비결이 자못 궁금하다.
정면에 우뚝 솟은 산의 경사로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툭 터진 능선을 만난다.(12:15)
주산재에 도착한다. 주산재는 좌측 아래 동리 이름 주산리에서 연유된 재이름으로 추정된다.
우설령으로 내려가는 3거리 길이 뚜렷하고 정면으로는 아득히 높은 곳, 별 바위에서 먼저 도착한
회원님들의 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된 비알로 이어지는 와중에도 엄 나무가 또 일행을 더디게 잡는다.
이제는 마중물님 마져 가세하여 열심이다.
비탈에서 올라 오면서 땀을 훔치더니 애써서 채취한 것을 그 큰손으로 한 주먹을 내 베낭에 밀어 넣는다.
가까이서 본 잎이 영락없는 피마자 잎 같지만 크기는 조금 작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구간을 지나고 내 딛는 걸음 앞으로 펼쳐진 별 바위(12:40),
별바위…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던가 ?
3-4명이 올라설 만한 좁은 정상, 그러나 사방으로 툭 터진 전망이 기가 막힌다.
오늘 산행 내내 조망이 없어서 답답한 심경을 일순간에 날려버린다.
첫번째 절경은 발아래 주산지主山池와 그 주변 산세이다.
잔잔한 주산지에는 물이 가득하고 주변으로 왕 버들이 물에 드리워져 있는 모습이다.
주산지는 영화 “봄.여름.가을.그리고 겨울” 촬영지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며
물속에서 자라는 왕버들 때문에 더 기이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시기적으로는 289년 전인 1721년에 만든 저수지라고 한다.
저수지 아래에는 부동면이 자리하고 청송읍으로 향하는 도로가 암록색 산자락에 실낱같이 걸쳐있다.
연두색과 짙은 초록이 아름답게 이어지는 계곡과 능선은 한 폭의 수채화이다.
별바위에서 조망한 주산지
지나온 능선
별바위에서 우측으로 갈래치는 능선은 절골(계곡) 방향으로 이어져서 가메봉,왕거암으로 이어지며
왕거암에서는 오늘 우리가 지나온 능선이 용틀임을 하면서 따라오는 모습이다.
시계방향으로 조금 더 방향을 틀면 주산재에서 우설령으로 떨어지는 능선이고
그 뒤로,옥계계곡,청송 얼음골 능선이 큰 울을 치고 손짓한다.
마지막 방향은 앞으로 가야 할 남은 능선, 피나무재 방향은 말 잔등에서 휘날리는 말갈기 같은 모습으로
뻗어있고 무포산이 그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듯한 형상이다.
별바위,
올라오는 능선이 경사가 높고 험해서, 힘이 들어서 낮에도 별이 보인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잠시 눈을 감고 이곳에 드러누워서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환상에 젖어본다. .
온 세상의 별이 다 내게로 쏱아진다.
별자리를 찾아 하나 둘씩 별을 헤아린다.
눈이 시리도록 산정의 밤은 맑고 밝다.
산짐승의 울음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은은한 음악으로 들린다.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들여다 본다.
그님의 눈에도, 내 눈에도, 주산지에도, 하늘에도 별이 반짝인다.
환상이래도 좋고 몽상이래도 좋다.
진정 그리하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다음 산행에서 이곳을 세벽에 통과하여 그냥 지나쳤겠지만,
절경을 조망할수 있었던 것은 산행대장의 현명한 판단으로 낮에 이곳을 통과 하도록
계획을 수정한 덕택이다.
소설가 이청준 님의 소설, “별을 보여드립니다”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서
만년필을 상품으로 받았던 학창 시절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러한 감동적인 별바위에 얽힌 유래는 다소 싱겁다.
주산지에서 올려다 보면 동쪽 산 정상에 위치한 기암으로 별바위, 성암(星岩)이라 부른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로는 옛날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중 재를 넘어가다 우연히
바위를 쳐다보니 바위사이에 별이 떠 있었다, 선비는 이 별을 보고 소원을 빌었고 그 후
소원대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별바위라 부르고 소원을 빌었다고 전해온다.
통천문 암봉에서 올려다본 별 바위
내려서는 급경사 비탈길 옆, 별바위에서 이어지는 바위에 사람 두어명이 지날 정도로 구멍이 크게 뚫린
통천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12:55)
통천문 암봉 위에 올라가서 쳐다보는 별바위가 비로소 전체의 윤곽을 드러낸다.
3개의 큰 바위로서 개개 바위는 주먹만한 잔돌을 박아놓은 듯한 특이한 형상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 구간에서 만나는 바위는 거의 대부분 외부에 잔 돌을 박아 놓은 듯, 물결 무늬를
이룬 특이한 형상이다.
내려서는 등로는 흘러 내리는 토사와 잔돌로 위험 천만이다.
통천문을 우회하여 내려 서다가 다시 올라서는 능선에서 안부를 만난(13:05) 이후에는 고만 고만한 능선이 이어진다.
폐 헬기장에 떨썩 주저 앉아 휴식을 취한다. (13:15)
뒤 따라오던 성남정맥님과 또 한분은 아예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듯 꼼짝 않는다.
한동안 휴식을 하던 중 마중물님이 올라오면서 한 눈에 두릅을 발견하고 부산을 떤다.
태백산님과 둘이서 한 주먹이나 움켜쥐고 기뻐한다.
참두릅이라고 좋아하지만 내 눈에는 그게 그거다.
앞에선 봉우리 정상에서 두런 두런 회원님들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암봉에 도착하니
조금더 큰 공사(?)가 이어진다 (13:35)
암봉에서 바라보는 산 아래 동리는 조금 전보다는 좀더 넓은 밭과 들을 보여준다.
우설령에서 내려오는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 산 비탈에 흩어져 있는 농가,
울울창창한 숲을 배경으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산촌의 모습이다.
한동안 이어지는 내리막길 안부에 국립공원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14:00)
마지막 능선을 오르다가 중간에서 짧은 다리쉼을 한다.
능선에 올라서니 길게 이어지는 차량의 엔진 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서 절개지를 내려선다.
S자형 도로변 전나무의 초록색 숲이 오늘의 피로를 전부 흡수하는 듯하다.
그 색깔도 모양도 함께 담아가고 싶을 정도로 충동이 일어난다.
굽이치는 도로 주변으로 화단을 조성하여,빨간색 노란색 꽃을 가득 심었고
도로 옆에는 고개 넘어 청송 얼음골을 알리는 이쁘장한 나무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단아한 정자, 넓직한 잔디공원, 미리 도착한 20여 명의 회원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다.
정자에 앉아 시원한 막걸리를 들이킨다. (14:20)
마중물님의 특제요리, 주물럭 구이를 상추쌈에 싸서 한 입 가득 털어 넣는다.
끝을 냈다는 안도감, 별 바위를 바라본 황홀감, 맛있는 음식의 포만감에 폭 빠진다.
피나무 재
돌아오는 길 주변에서 또 한번 청송의 맑고 청정한 기운을 느낀다.
깨끝이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주변에는 붉은 황장목이 줄지어 이어지고
사이 사이 밭에는 웃 자란 청 보리가 바람에 넘실거린다.
차창 너머로 주왕산 암봉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풍경은 피나무재, 부동면, 청송읍을 거쳐 파천면 송소고택(메모 1.)까지 지어진다.
가히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다.
메모
그 하나, 청송군 파천면과 청송 심씨
청송읍에서 지방도를 따라 서쪽 방향으로 5분 거리에 있는 파천면 덕천리는
조선시대 500년에 걸쳐서 권세를 떨쳤던 청송 심씨의 본고장이다.
청송 심씨는 조선시대 정승 열 셋, 왕비 4명 탄생을 탄생시킨 가문이다.
이곳, 파천면 덕천리에는 9대에 걸쳐서 만석꾼을 낸 송소고택이 있다.
이 집은 영조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 처사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이 1880년대에 지은
집으로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조선시대 왕가가 아닌 민가는 최대 아흔 아홉 칸으로 제한을 한 탓에 , 99칸 7개 동으로
지었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 하다.(한 칸은 1.8m)
일명 청송 심부자집, 덕천동 심부자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63호 이자 경주 최부자집과 함께 해방이후 토지 개혁을 단행한 이후
집과 함께 이름만 전해 온다.
어떻게 이곳에 자리 하였을까 …?
고려시대 벼슬을 지낸 심흥부를 시조로 하고
증손 심덕부와 심원부로 크게 둘로 갈라졌으며
덕부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 이후 좌의정을 지냈으나
새 왕조를 버리고 강원도 태백 두문동으로 들어가 유훈을 지킨 심원부의 후손이
청송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청송읍에서 안동 길안면 방향으로 달리다가 야트막한 야산을 지나니
앞은 개울, 뒷산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자리잡은 송소고택,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마치 작은 궁궐을 보듯 펼쳐진다.
그 둘, 수준점水準點
산 높이나 비행 고도 등을 말할 때 「해발 몇 m」라고 한다.
해발고도(海拔高度 · sea level; altitude; 標高)는 말 그대로 바다로부터의 높이다.
그렇다면, 바다가 전혀 안 보이는 대륙 오지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해발고도를 잴까 ?
각 나라는 저마다 해발고도 측정을 위한 기준수면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천 앞바다가 기준이다. 바닷물의 높이는 조석 해류 기압 바람에 따라 늘 변하지만,
몇년에 걸쳐 평균을 내면 「해발 0 m」인 기준수면을 얻을 수 있다.
그 다음엔 이 기준을 가까운 육지 어디엔가 옮겨 표시해 놓아야 한다. 이것이 「수준원점(水準原點)」이다.
우리나라의 수준원점은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龍峴洞) 인하공업전문대학 구내에 설치되어 있으며
이곳의 정확한 해발 고도는 26.6871m이다.
웬만한 지각변동에 끄덕 없도록 지반을 다진 뒤 박아놓은 일종의 대리석 기둥으로,
1963년 국립지리원이 설치했다.
이후 국립지리원은 수준원점을 출발, 릴레이식으로 높이를 비교해가며 국토 전역에 2km
간격 으로 「수준점」 5,000여개를 설치했다.
(이 수준원점을 기준으로 국도 및 중요도로를 따라서 4㎞마다 1등 수준점이 설치되며,
1등수준점을 기준으로 2㎞마다 2등수준점이 설치된다.)
국도변이나 시골 학교 교정, 면사무소 화단 등지를 잘 살펴보면 소숫점 4자리까지, 해발고도가 적힌 대리석 수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측량사들은 이 수준점에 자(표척·標尺·staff)를 수직으로 세워놓고 멀리서 망원경(수준의·水準儀)으로 들여다보면서 주변 지형의 해발고도를 비교-측정한다
( 국립지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