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레킹일자 : 2023.01.17. (화)
♧ 트레킹코스 : 황산주차장-소리길탐방지원센터-농산정-길상암-해인사-치인주차장 // 이상 거리 약 12.2km, 트레킹 시간 약 4시간 2분(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 여행세부일정
○ 07:20 : 죽전고속도로(하행) 버스정류장
○ 11:26 : 합천도예협회 도자기전시관 앞 도로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94-1
○ 11:30 : 황산주차장
○ 11:39 : 소리길탐방지원센터
○ 11:42 : 무릉교
○ 11:50 : 칠성대
○ 12:00 : 소리길생태연못
○ 12:15 : 해인사 일주문(홍류문)
○ 12:19 : 홍류동
○ 12:21 : 농산정
○ 12:31 : 취적봉,음풍뢰
○ 12:33 : 분옥폭
○ 12:37 : 제월담
○ 12:47 - 13:19 : 길상암
○ 13:24 : 낙화담
○ 13:29 : 첩석대
○ 13:30 : 홍류동간이발전시설
○ 13:31 : 회선대
○ 13:40 : 해인사성보박물관
○ 13:54 : 보현암, 금강굴
○ 14:06 : 삼선암
○ 14:09 : 김영환장군 팔만대장경수호공적비
○ 14:16 : 금선암
○ 14:25 : 원당암
○ 14:33 : 홍제암
○ 14:44 : 용탑선원
○ 14:48 - 15:05 : 해인사
○ 15:07 : 영지
○ 15:20 : 해인사성보박물관
○ 15:32 : 치인주차장 도착 트레킹 종료
가야산 소리길...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트레일입니다.
가을 홍류동계곡이 특히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미답 트레일입니다.
마침 자주 이용하는 안내산악회에서 가야산 산행공지가 떴는데 가야산, 남산제일봉, 가야산소리길을 선택할 수 있군요.
가야산과 남산제일봉은 두세번씩 다녀온 곳이어서 오늘은 가야산소리길 트레킹을 할 생각으로 산악회버스에 올랐습니다.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정류장을 7시 20분경 출발한 산악회버스가 차량 이상으로 예정보다 약 40분 늦게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합천도예협회 도자기전시관 앞 도로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하차해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삼거리에서 우측 오후 5시 방향 마을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서 황산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황산주차장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주차장을 나와 우측 마을도로를 따라 소리길탐방지원센터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안내산악회 버스를 타고 오신 분들 중 대부분이 가야산과 남산제일봉 산행을 가시고 소리길 탐방을 하는 사람은 몇명 안되는군요.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홀로 트레킹을 시작했습니다.
소리길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가야산 소리길 문주를 통과했습니다.
평일이고 겨울철이어서 찾는 이가 없어서 그런지 탐방지원센터 근무자도 없군요!
■ 홍류동 계곡은???
홍류동 계곡은 합천 가야면 소재지에서 해인사까지 약 6㎞ 이어진다. 가을에 단풍이 떨어지면 계곡이 온통 붉은 기운을 띤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지만, 빼어난 경치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개울과 숲길을 따라 ‘소리길’이라는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음미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길이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오르막으로 특별히 힘든 구간은 없다. 가야산국립공원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탐방로도 대체적으로 깔끔하다. 시원하게 발 한 번 담글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짙은 그늘 속 청량한 물소리와 함께하는 길이니 한나절 더위를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략 2시간이 걸린다.[출처 : 한국일보]
첫번째 안내판이 있는데 무릉교라고 합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리는 보이지 않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다리'라고 씌어 있군요.
즉 무릉도원인 이곳 홍류동계곡으로 들어가는 다리역활을 하는 곳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데크길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 계곡 경치를 제데로 보기가 어렵군요.
마지막 사진에 보듯이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올해 힌남노 태풍의 흔적인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지나 갔습니다.
다음 한시는 무릉교 안내문에 적힌 시입니다.
架壑飛紅枕澗身(가학비홍침간신)
如今不見避秦人(여금불견피진인)
紅霞隔水聞鷄犬(홍하격수문계견)
始覺桃源咫尺隣(시각도원지척린)
건너지른 붉은 다리가 개울을 베고 누웠는데
지금 진(秦)의 화(禍)를 피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구나.
붉은 노을은 물을 비껴나고 개 닭소리 들려오니
비로소 무릉도원이 가까워짐을 알겠구나.
칠성대를 만났습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북두칠성에 예향 하던 곳'이라 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안내문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적혀 있습니다.
戌削穹窿老石臺(술삭궁륭노석대)
焚香禮斗步虛迴(분향예두보허회)
縱知仁壽非求得(종지인수비구득)
猶乞瓊醬捧玉盃(유걸경장봉옥배)
깍은 듯이 만든 활모양의 노석대(老石臺)에서
북두(北斗)에게 예향(禮香)하고 빈걸음으로 서성거리도다.
비록 산수 즐기지 못할 줄 알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술 옥잔에다가 받들길 바라노라.
칠성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박상희라는 분이 조성했다는 '바위에 갇힌 부처를 보다'라는 예술작품이 있습니다.
저 같은 길손이 걷다가 힘들 때에는 기도하며 쉬어가는 그런 곳이라고 하네요.
또 '당신이 떨치지 못하는 한'이라고 새긴 넙적한 돌이 둥근 바위 위에 올려져 있네요.
소리길 생태연못에 도착했습니다.
첫번째 사진에 보이는 안내도 사진에는 분명 연못이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물이 전혀 없습니다.
연못의 흔적은 보이는데...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라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뭔 소리여??
내용을 읽어보니 다음 기사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불교 목탁의 유래는 설화의 형식을 띤다. 어느 절에 덕 높은 큰스님이 제자를 두었는데 그 제자가 제멋대로 계율을 어기고 방탕하다가 그만 몹쓸 병으로 요절했다. 세월이 흘러 하루는 큰스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를 만나게 된다. 그 물고기는 다름 아닌, 전생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죽은 제자였다. 그 물고기는 큰스님에게 다가와 말했다.
“제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등에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의 몸을 받았습니다. 이제 큰스님을 만나 저의 허물을 깊이 참회하오니 부디 저를 천도시켜 주시고 제 등의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서 모든 이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깨우쳐 주는 도구로 삼아 주십시오.”
이에 큰스님은 제자의 청대로 물고기 등의 나무를 베어 목어를 만들어 절에 매달아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깨우침의 상징인 목탁은 설화와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출처 : 법보신문]
올라 갈수록 멋진 홍류동계곡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옵니다.
산길 옆에 쓰러진 나무들이 많이 보입니다.
마지막 사진에 보이는 저것은 관리공단에서 쓰러진 나무를 잘라 일부러 저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해인사일주문인 홍류문에 도착했습니다.
소리길탐방지원센터에서 이곳까지 약 36분 걸렸습니다.
이곳 홍류문에는 해인사 매표소가 있습니다.
이곳 해인사 문화재관람료는 3,000원입니다.
카드결제도 되나 봅니다.
해인사일주문인 홍류문을 지나서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안내문을 만났습니다.
이어 얼마지나지 않아 '수석과 산림이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홍류동에 도착했습니다.
역시 홍류동 안내문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씌여 있네요.
春風躑躅發層蠻(춘풍척촉발층만)
膩漲臙脂水鏡間(니창연지수경간)
若使重移楓葉景(약사중이풍엽경)
溶溶錦浪半函山(용용금랑반함산)
봄바람에 철쭉이 온 산봉우리에 피어나니
거울 같은 물속에 붉은 연지 가득하구나
만약에 단풍의 붉은빛을 다시금 옮긴다면
크고 넓은 비단 물결에 반쯤은 잠기리라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이 홍류동을 지나 다리 위에서 홍류동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어 농산정에 도착했습니다.
안내석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던 곳이라고 하네요.
"이 곳은 신라말의 거유(巨儒)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던 곳이다. 원 정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것은 고운선생의 후손과 유림에 의해 1936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후 1990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건너편에는 치원대(致遠臺) 혹은 제시석(題時石)이라 불리는 석벽이 있고 거기에는 고운의 칠언 절구 둔세시(遁世時)가 새겨져 있다. 정자의 이름도 그 시의 한 귀절을 빌어 농산(籠山)이라 하게 되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아한 정방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자 현판에는 김영한(金寧漢)이 쓴 농산정기(農山亭記)와 찬양사(讚揚辭) 4수(首)가 기록되어 있고, 고운선생의 둔세시를 차운(次韻)한 시 8수(首)가 있다. 시 중에는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차운시도 들어 있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농산정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네요.
잘은 모르지만 첫번째 사진은 농산정중수기, 두번째 사진은 농산정상량문인 듯 합니다.
농산정에서 바라본 다섯번째 사진에 보이는 커다란 암반에 멀리서 봐도 한자들이 각자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
- 글 고운 최치원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돌 서리를 마구 흘러 겹친 봉우리 사이 골에 마주 울리니,
남의 말하는 소리 지척인데도 알아듣기 어렵네.
옳으니 그르니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하여,
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둘러싸게 했구나.
"신라 말기,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며 신라 골품제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고운(孤雲) 최치원은 홍류동(紅流洞) 계곡물에 속세의 때를 씻어버리며 바위벽에 칠언절구를 남겼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옳으니 그르니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둘러버렸다네.” 최치원이 삶의 마지막을 가야산 품에 안겨 보낸 속내를 읽을 수 있다."[출처 : 연합뉴스]
농산정을 나와서 조금 더 올라가니 '취적봉, 음풍뢰' 안내문이 있습니다.
'선인이 내려와 피리를 불던 바위, 풍월을 읊는 여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에도 취적봉이 있지요.
단종대왕님의 아드님이 그곳에 유배되어 부모를 그리워하며 피리를 불곤 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는 정선의 취적봉 그리고 그 아래에는 덕산기계곡이 흐르는데 그곳과 아주 유사한 곳입니다.
건너편에 아주 높은 석벽이 보이는데 나무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곳이 취적봉인 듯 합니다.
다음은 안내문에 있는 한시입니다.
♧ 취적봉 ♧
春山春雨染靑螺(춘산춘우염청라)
石氣涳濛樹影多(석기공몽수영다)
玉笛數聲雲不捲(옥적수성운불권)
也知峰月浴銀河 (야지봉월욕은하)
산봉우리 봄비 내리니 푸른빛 물들고
돌엔 서기가 가득하고 나무그림자 짙어 지네
옥피리 몇 가락에도 구름은 걷히지 않으니
봉우리의 달이 또 은하수에 목욕함을 알겠도다.
♧ 음풍뢰 ♧
溪聲山色朅來中(계성산색걸래중)
如羾寒門累始輕(여공한문루시경)
陶令臨流何足較(도령림류하족교)
浪吟明月與淸風(낭음명월여청풍)
물소리와 산 빛사이로 오가는 가운데
한문에 오른 듯해 세속(世俗) 누(累)가 비로소 가벼워지누나
도연명이 시냇물의 결(潔)함에 어찌 족(足)히 비길까
나도 명월(明月)과 청풍(淸風)을 낭랑(朗朗)하게 읊조리네.
"조선시대 신필청이 쓴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81년 1월21일 낙화암을 지나 분옥폭에 이르렀다. 음풍뢰, 완재암, 제월담, 광풍뢰를 보니 모두 최치원이 이름 붙인 곳으로 지금도 바위에는 자획이 완연하여 난새와 봉황이 날아오르는 것 같으니, 최치원이 쓴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손으로 어루만지며 오래도록 돌아 갈 것을 잊었으니 어찌 다만 산과 시내가 아름다워서 그러하겠는가? 아니면 또한 최치원의 풍취를 그리워하여 그려했는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음풍리, 체필암, 모두 해인사 골 안에 있다. 이 지역에 봉우리가 사방에 우뚝하고 급한 물결이 바람을 뿜어서 소리가 전진(戰陳)의 말(馬)과 같다. 커다란 돌이 시내를 임했는데 이끼가 끼지 않고 미끄럽기가 갈아 놓은 것 같아, 붓으로 글씨를 쓸 만하다” 찬성 강희맹이 일찍이 남쪽지방에 유람하다가 여기에 와서 “이와 같이 훌륭한 곳이 아직도 이름없다하니 어찌 문인묵객(文人墨客)의 부끄럼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에 물은 음풍뢰, 돌은 자필암이라 하였습니다. 음풍뢰 시(詩)에 “뿜은 물방울은 뛰는 구슬이 급하고, 놀란 물결은 주름진 비단이 깊다. 바람맞이에서 볼수록 부족한데, 웅덩이 밑에는 용이 있어 읊조리네” 하였고, 채필암 시(詩)에 “쇠로 깎은 듯 천 길이 장하다. 구름이 피어나니 일만 구멍이 서늘하다. 완(頑)하여 아는 것 없이 우뚝 선 것은 다만 창창(蒼蒼)할 뿐이다” 하였습니다."[출처 : 합천신문]
취적봉과 음풍뢰를 지나 분옥폭에 도착했습니다.
'옥을 뿜듯이 쏟아지는 폭포'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나무가지 때문에 안내문 사진에 보이는 폭포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飛虹撞石噴瓊瑤(비홍당석분경요)
萬顆玲瓏映碧綃(만과영롱영벽초)
箇是仙家眞寶藏(개시선가진보장)
莫敎流出武陵橋(막교유출무릉교)
하늘의 무지개가 바위에 걸려 고운 옥 뿜어내니
갖가지 영롱한 구슬이 푸른 비단에 비치네.
이것이 신선세계의 진보배창고인지라
흐르는 물도 무릉교를 벗어나지 않는구나.
분옥폭을 지나 제월담에 도착했습니다.
'달빛이 잠겨있는 연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金波瀲灩躍浮光(금파렴염약부광)
夜靜山空桂葉香(야정산공계엽향)
潭上何人吹碧玉(담상하인취벽옥)
飛來飛去曳霞裳(비래비거예하상)
금빛 파도 반짝이니 달그림자 일렁이고
고요한 밤 빈 산에 계수 잎만 향기롭구나.
그 누가 못 위에서 옥피리를 불길래
날아가며 드리우는 붉은 치마여!
제월담을 뒤로하고 길을 걷는데 큰 거목 하나가 쓰러져 길을 막았습니다.
아마도 공단에서 나무를 치우지는 않고 나무를 잘라 통행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 놓은 듯 합니다.
이 역시 작년 힌남노 태풍의 흔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길상암에 도착했습니다.
정확히는 길상암 입구입니다.
소리길탐방지원센터에서 이곳까지 1시간 8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어짜피 이곳에서 바로 해인사 방향으로 올라가면 트레킹 거리는 약 6km 내외에 시간은 아마도 2시간 내외로 너무 짧습니다.
일단 길상암을 둘러보고 가기로 하고 가파른 목조계단을 올라갑니다.
가파른 나무계단길을 올라 대장전에 올랐습니다.
올라오는 도중에 좌측으로 부처님의 어머님을 모셨다는 불모전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한번 가보는 것으로 하고....
네번째 사진이 대장전의 모습인데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다섯번째 사진은 삼성각.
대웅전 문틈으로 들여다 보니 산님 한분이 들어가 예불을 올리고 계십니다.
대웅전을 지나 적멸보궁으로 향합니다.
가파른 돌계단길을 올라야 합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입니다.
당연히 문은 굳게 닫혀 있네요.
이제 길상암을 내려가야 할 때입니다.
세번째 사진이 적멸보궁 아래에 있는 대각천입니다.
아마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약수라는 의미인 듯...
♧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적멸보궁(寂滅寶宮))]
길상암을 내려가는 길에 부처님 어머니 마야부인을 모셨다는 불모전에 들렀습니다.
한국에는 하나 뿐인 불모전이라고 하네요.
당연히 이곳도 내부는 보지 못했습니다.
길상암을 내려와서 약 5분 후 낙화담에 도착했습니다.
'꽃이 떨어지는 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風雨前霄鬪澗阿(풍우전소투간아)
滿潭流水落花多(만담유수낙화다)
道人猶有情根在(도인유유정근재)
雙淚涓涓添綠波(쌍루연연침록파)
어젯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못 가득히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아라.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가 남아있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은 소리길 4구간인 길상암에서 영산교까지라고 할 수 있다. 낙화담, 물레방아 등을 만날 수 있다. '꽃잎이 떨어지는 연못'이라는 뜻의 낙화담을 내려다보는 바위 절벽은 봄에는 진달래꽃이, 가을에는 꽃보다 붉은 단풍이 곱게 수놓는다.
그러나 절경이라는 단어는 4구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2구간에서 4구간까지 계속되는 홍류동 계곡 길 전체가 빼어난 경승이다. 천년 노송이 숲을 이루고, 솔숲을 비집고 들어온 활엽수림은 젊은 기상을 뽐낸다.
무엇보다 유난히 희고 웅장한 화강암 바위들이 홍류동 계곡의 위엄을 대변한다. 가야산은 한국 12대 명산 중 하나다. 홍류동은 가야산의 많은 계곡 중 가장 운치가 있다."[출처: 연합뉴스]
낙화담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비교적 다른 곳과는 달리 소리길 데크에서 온전한 낙화담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엿 선인들도 이곳을 많이 찾았던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낙화담 바위 표면에 이곳을 찾은 이들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이 많이 눈에 띕니다.
낙화담에서 첩석대에 도착했습니다.
세번째 사진에 보이는 저 바위에는 자기 이름 뿐만 아니라 자식녀석들 이름까지 새겨 놓았습니다.
모든 욕심 버리고 혼탁한 세상시비를 피해 이곳에서 은거하며 수도한 고은 최치원선생을 입으로는 칭송하면서 정작 본인은 자기 이름 뿐만 아니라 자식들 이름까지 천년만년 떨치고 싶었나??
첩석대는 '암석이 쌓여있는 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울 건너편에 마지막 사진에 보듯이 쌓여있는 거대한 암석들이 첩석대인 듯 합니다.
重重石級似堆盤(중중석급사퇴반)
造物緣何巧削來(조물연하교삭래)
正眼開時方始見(정안개시방시견)
縹箱金笈錯雲罍(표상금급착운뢰)
거듭 포갠 돌무더기 쟁반처럼 쌓였으니
조물주가 무슨 까닭에 그 솜씨로 다듬었나.
바른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니
옥빛 금빛 상자에 구름무늬 잔이 섞여있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간이발전시설을 만났습니다.
1950년대 인근 계곡물을 끌어들여 수차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 썼다는 군요.
이어 그 위에는 회선대가 있 습니다.
'선인이 모여 노는 바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鸞笙瓊珮二千年(난생경패이천년)
猶見層臺纈紫煙(유견층대힐자연)
休道仙人消息斷(휴도선인소식단)
一雙靑鶴下芝田(일쌍청학하지전)
난생과 경패의 이천년에
층대에는 보랏빛 연기가 맺혀있네.
선인의 소식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말라.
한 쌍의 청학이 지전에 앉는구나.
회선대를 끝으로 도로로 내려섰습니다.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확인하고 해인사 성보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회선대에서 약 9분후 성보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좌측 옆으로 소리길은 해인사로 이어집니다.
해인사성보박물관에 도착해서 잠시 고민했습니다.
성보박물관에서 해인사는 불과 900m 거리에 불과합니다.
가야산 산행팀이 있어서 오늘 안내산악회에서 주어진 트레킹 시간이 6시간인데 이제 겨우 2시간 트레킹을 했습니다.
해인사로 바로 올라가면 1시간 정도면 트레킹이 끝이나서 너무 짧습니다.
결국 좌측에 암자들을 둘러보고 해인사를 거쳐서 치인주차장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보현암으로 향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은 없지만 이곳 해인사에서는 부속 12개 암자 순례코스를 만들어서 완주한 사람들에게 선물도 준다고 합니다.
해인사성보박물관에서 약 14분 후 보현암에 도착했습니다.
금강굴도 암자이름이고 보현암 옆에 금강굴이 있습니다.
위 사진 중 2,3,4번째 사진이 보현암 모습이고 나머지 5,6번째 사진이 금강굴 모습입니다.
이 두 암자는 모두 비구니 암자라고 합니다.
"해인사 입구에서 계곡을 지나 오른쪽 산으로 향하면 보현암과 금강굴이 나온다. 보현암은 1973년 혜춘스님이 창건했다. 혜춘스님은 비구니계의 큰 어른으로 1985년부터 95년까지 초대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하며 비구니 교단 확립에 큰 기여를 했다.
보현암과 나란히 있는 금강굴은 1976년 창건한 비구니 스님들 수행처로 성철스님의 혈육 불필(不必)스님이 계셨다. "[출처 : 불교신문]
보현암과 금강굴에서 다시 도로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금선암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보현암에서 약 10분 후 삼선암이라는 암자를 만났습니다.
해인사 부속이니 암자라고 하지 왠만한 절 규모인 암자입니다.
"1893년 자홍스님이 창건하고 1904년 보찬 지종 두 스님이 중건한 삼선암도 비구니 문중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1955년 비구니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교구본사 주지를 역임하고 1926년 국일암 대교과를 수료하는 등 선교 가람불사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긴 성문스님이 삼선암에서 가행정진하며 제자들을 제접했다. 성문스님의 속가 동생이며 최초의 비구니 전계사 정행스님도 삼선암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출처 : 불교신문]
삼선암에서 다시 해인사로 올라가는 주도로로 나오자 해인사종합관광안내소가 있습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올라갑니다.
먼저 '김영환장군 팔만대장경수호공적비'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 분은 6.25전쟁 전사시간에 배운 적이 있습니다.
1951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지원명령을 받고 출격했다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상부 명령을 거부했던 분이십니다.
당시 편대장이었던 저분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없었다면 지금 쯤 팔만대장경은 불에 타버려서 후세에 물려 줄 것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쪽에는 성철스님 부도와 길상탑이 보입니다.
"해인사 일주문 가기 전 위치한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간 이 탑의 내력을 알지 못하였으나 지난 1965년 본탑 중에서 발견된 최치원선생이 지은『해인사 운양대 묘길상탑지』에 의하면 신라진성여왕 9년(895)을 전후하여 7년간에 걸쳐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들을 위해 당시 해인사의 대덕 훈혁스님이 농촌으로 다니면서 벼 한 단씩을 희사시켜 군량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는 이 삼층석탑을 세웠으니 이는 오로지 전란에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고혼들의 명복과 국태민안을 빌기 위하여 세우게 되었는바 조각담당은 난교스님이었고 탑의 높이는 13척, 소요물품은 황금3푼, 수은11푼, 동9정, 철260칭, 탄80석, 벼 20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출처 : 뉴스웨이]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표지석을 보고 두번째 사진에 보이는 카페 앞에서 금선암 이정표를 보고 금선암으로 이동했습니다.
알고서 이렇게 다니는 것은 아닌데 트레킹 기록을 정리하다 보니 제가 이날 온통 비구니 암자들만 돌아다녔더군요 ㅋㅋ
암자순례에는 전혀 관심 없이 왔다가 트레킹이 너무 일찍 끝날 것 같아 해인사 올라가는 길 좌측 암자들을 드나들며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해인사에는 많은 비구니 암자가 있다. 여러 교구본사 중에서 해인사가 가장 많은 비구니 암자를 두고 있다. 그 대부분이 선원을 운영한다는 점도 특별하다. 일제시대 강원을 개설했던 국일암을 비롯 삼선암 반야선원, 약수암 죽림선원(竹林禪院), 보현암선원, 금강굴, 금선암에 이르기까지 해인사 비구니 스님들이 주석하는 암자는 모두 선원을 개설하고 정진한다. "[출처 : 불교신문]
금선암에서 다시 나와서 도로 따라 올라가다 홍제암, 원당암 이정표를 보고 이동하다 다시 삼거리에서 좌측 원당암으로 향했습니다.
육안으로 봐도 그 동안 들렀던 암자들보다 규모가 더 큽니다.
"원당암은 해인사를 낳은 어머니와 같다. 신라 애장왕은 부처님 가호로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순응 이정 두 대사의 발원에 따라 국력으로 해인사를 창건한다. 당시 국왕은 서라벌을 떠나 원당암에서 불사를 독려하면서 국정을 볼 정도였다.
이에 원당암을 수도 서라벌 북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뜻에서 북궁(北宮)이라 부르기도 했다. 창건 당시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봉산(飛鳳山) 기슭에 있다하여 봉서사(鳳棲寺)라 하였고 진성여왕 시대부터 본격적인 신라 왕실의 원당이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願堂庵)이라 불렀다.
해인사 창건 기지 역할을 한 원찰 답게 원당암에 서면 해인사의 주요 권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적광전과 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이 정면에 들어오고 그 오른쪽 희랑대가 보이며 백련암 뒤 환적대도 지척이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가야산 최고봉 상왕봉이 아련하다.
그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공부하다 죽어라’고 쓴 돌기둥이다. 이 말은 제10대 종정을 역임하고 원당암에서 정진했던 혜암스님이 평소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가르침이다. 스님의 제자 무불스님은 이 문구를 평생 화두처럼 선방에 걸어놓고 정진한다. 원당암은 고시원처럼 운영되던 것을 총림 지정 후 혜암스님이 들어오면서 참선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재가자 전문 달마선원이 특히 유명하다. 서출동류(西出東流), 서쪽에서 나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가장 좋다는데 원당암이 그러하다. "[출처 : 불교신문]
원당암에서 다시 도로를 따라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홍제암으로 향합니다.
오늘 돌아다닌 암자들 중 제가 유일하게 들어서 알고 있는 암자입니다.
바로 사명대사님 때문에 이곳을 알고 있었던 곳입니다.
입구에 '사명대사 석장비'도 보이고 홍제암 안내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홍제암 내부의 모습을 둘러 보고 나와서 이제 용탑선원으로 향했습니다.
"용탑선원 옆은 사명대사 부도와 비가 있는 홍제암이다.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사명대사가 말년에 수행하다 입적한 곳으로 선조가 지어 하사했다. 입적 후 스님의 부도와 홍길동 저자 허균이 지은 석장비가 있으며 광해군이 표충사를 지어 임란 승병의 세 스승 휴정 유정 영규 대사를 모셨다. 1943년 일제 때 합천군수 다케우라가 석장비를 네 조각으로 훼손 한 것을 1958년 다시 보수해 지금도 십자가 모양의 상처가 있다. 북한산성을 축조했던, 승군대장 계파당 성능대사 부도도 사명대사 부도 옆에 있다.
홍제암에서 꼭 기억해야하는 고승은 자운스님이다. 용성스님 상좌인 자운스님은 은사를 이어 계율을 바로 잡아 청정계단을 세운 분이다. 스님이 아니었으면 한국불교는 여전히 복잡한 계맥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기차 안에서 계를 주던’ 혼란한 시대에서 모든 조계종도가 동일하게 수계하는 단일계단으로 통일하고 초대 전계대화상을 역임한 자운스님의 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김용사에 계시던 성철스님을 많은 사람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인사로 모셔 초대 방장으로 추대한 분도 자운스님이다. "[출처 : 불교신문]
용탑선원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3.1운동 민족대표 한분의 유덕과 유훈을 기리기 위해 1945년에 세운 절이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습니다.
"해인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암자는 용탑선원이다. 백용성스님 탑을 지키던 제자들이 스님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절이다. 3·1운동을 이끈 민족 지도자이며 끊어진 계맥을 이어 불조의 혜명을 되살렸으며, 역경 포교 문화 불교 전반에 걸쳐 혁신과 대중화를 이끈 근대화 선구자이시며 선교율을 갖춘 삼장법사 백용성스님은 해인사는 물론 오늘날 한국불교의 뿌리다. 스님은 지금은 선원으로 쓰는 극락암에서 출가했다.
그 제자들이 오늘날의 조계종을 만들고 해인사를 지킨다.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을 보호하며 수행하던 ‘보살’이 대승불교를 일으켰듯, 용성스님의 부도와 탑을 지키고 공부하던 제자들이 청정수행가풍을 지키고 승가공동체를 되살렸다. 일제가 대처육식을 권장하자 이를 중단하라는 건백서를 제출하고 대각교를 세워 민족불교 청정비구승단을 지켰으니 그 정신이 해방 후 정화운동과 조계종으로 이어졌다. "[출처 : 불교신문]
용탑선원을 나와서 토신골탐방지원센터를 만났습니다.
이제 해인사로 들어 갑니다.
용탑선원에서 해인사는 불과 200m 거리입니다.
그 동안 이곳 해인사는 산행을 하면서 서너번 들렀습니다.
두번째와 세번째 사진에 보이는 범종루가 눈에 확 들어 옵니다.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는 법보공간으로 올랐습니다.
다섯번째 사진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고 마지막 사진이 팔만대장경 사진입니다.
수없는 국난 속에서도 지켜왔던 우리의 국보인데 어처구니 없게도 1950년대에 또 한번 위기가 있었는데 앞서 보았던 김영환 장군의 올바른 역사인식 때문에 지금 제가 이렇게 문틈으로라도 볼 수 있습니다.
해인사는 매년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호국추모제를 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의 규모 있는 사찰은 총 969곳이었다. 그런데 이 중 약 25%인 180곳이 전쟁 과정에서 소각 및 파괴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수가 아군에 의한 만행이었다는 점이다. 산사는 북한군의 거점이 될 수 있으므로 야만적인 파괴가 단행된 것이다.
1951년 해인사 역시 폭탄 투하를 통해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공중 폭격의 책임자였던 김영환 대령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해인사 폭격을 중지한다. 당시 김 대령은 이승만의 경무대로부터 "해인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무전을 받기도 했다. 전쟁 중 대통령 직속의 경무대까지 관여된 명령에 불복한다는 것은, 대장부의 심장과 문화적인 강력한 확신이 없었다면 단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김영환은 군법회의에 불려 나갔을 때,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철수했다"라고 당당한 소신을 천명했다. 훗날 우리 정부는 김영환 장군에게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은 절체절명의 해인사를 구한 대신, 자신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봉착했었다.
만일 김영환이 죽음을 불사하고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니 인류는 불교를 넘어 최고 목판 인쇄술의 결정체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1872년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통일신라 때 조성된 높이 5.6m에 달하는 법주사의 대불을 녹인 것과 같은 야만적 행위가 또다시 재현될 뻔한 실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김영환 장군의 위패가 해인사 장경판전 안의 양지바른 곳에 봉안되어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구한 은혜를 사찰에서는 최고의 예우로 갚고 있는 것이다."[출처 : 한국일보]
대장경 판본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두번째 사진에 보이는 대장경 보존모습으로 갈음하고 해인사를 내려갑니다.
네번째 사진은 요즈음 산사에서 흔히 보는 소원나무.
예전에도 해인사에 있었던가?
기억이 없습니다.
해인사 도로를 따라 내려와서 영지를 지났습니다.
가야산 정상이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영지라고 한답니다.
강원도 춘천 오봉산을 청평사에서 올라갈 때 그곳에도 부용봉이 비친다고 하는 영지라는 면못이 있는데 이곳 해인사 가는 길에도 거이 비슷하게 생긴 연못이 있습니다.
이어 백련암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성철스님과 인연이 깊은 암자인데 우측으로 1km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백련암을 들렀다 갈까도 생각했지만 춥기도 하고 무엇보다 배가 유달리 고팠습니다.
내가 암자순례를 하려고 온 것도 아니지만 어짜피 올해이든 내년이든 가야산소리길을 제대로 한번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내려가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치인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해인사를 내려와서 해인사성보박물관을 거쳐 도로를 따라 치인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주차되어 있는 산악회버스를 확인하고 위쪽 치인상가로 이동해서 식당 한곳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트레킹을 마치고...[ 가야산소리길 낙화담 모습]☜
트레킹기록을 정리하면서 확인해보니 가야산소리길은 공원외지역과 공원내지역 합쳐서 약 6km라고 하더군요.
결국 안내산악회가 오늘 정한 코스인 소리길탐방지원센터부터 해인사까지는 공원내지역을 걸은 것이고 공원외지역인 대장경테마파크부터 소리길탐방지원센터까지 약 2km는 걷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전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트레킹을 오다보니 얼마 걷지 않았는데 해인사가 훅 다가와서 결국 부속암자 몇 곳을 드나들어 생각지 않게 주로 비구니들이 수도하시는 암자순례를 겸했습니다.
홍류동계곡은 가을에 빛을 발하는 곳이고 또한 오늘 그냥 지나쳤던 옛 사람들의 흔적도 있으니 올해 가을 평일에 한번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다 바람 같은 거야 ♧
- 글 묵연스님
다 바람 같은거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 일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거야
가을 바람 불어
곱게 물든 잎들을 떨어 뜨리듯
덧없는 바람 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일 뿐인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하니
결국 잡히지 않는게 삶인 걸
애써 무얼 집착하니
다 바람인 거야
그러나 바람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가는 게 좋아
-묵연스님 시집
'너를 위하여 나를 버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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