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 : 2006. 11. 25 - 26.(무박 2일)
■ 산행코스
여원재-(5.47)-고남산-(5.0)-매요리-(3.3)-사치재(88고속도로)-(2.93)-새맥이재-(1.4)-시리봉-(3.38)-복성이재// 21.48km
■ 함께 하신 산우님
후니님, 자연사랑님, 여행강타님, 다니엘님, 랑랑공주님, 피오나님, 설백호님, 아리아리님, 국화님, 신용종님, 만정님, 호호님 그리고 너울
이상 13명 (총 13명)
■ 이동경로 및 산행코스
ㅇ 2006. 11. 25. 10:10 : 안양 농수산물 시장 출발
ㅇ 2006. 11. 26. 02:20 : 지리산휴게소 도착
- 간단한 식사(라면, 누룽지 등)
ㅇ 03:40 : 여원재 출발(산행시작)
ㅇ 06:20 : 고남산(846.5m) 도착
ㅇ 08:10 : 매요리 마을 도착
ㅇ 09:10 : 사치재 도착
ㅇ 09:37 : 사치재에서 식사 완료 후 출발
ㅇ 12:00 : 아막성터 도착
ㅇ 12:13 : 601.4봉 도착
ㅇ 13:10 : 복성이재 도착(산행 종료)
ㅇ 14:10 : 복성이재 출발
ㅇ 20:20 : 안양농수산물 시장 도착
이상 산행시간 : 9시간 50분(후미 기준)
여원재...
한달만에 다시 운성대장군님을 뵙는다.
새벽 03시 40분.
사방이 어둠속에 뭍혀 있던 이 남원골 산골짜기에 느닷없이 산꾼들이 들어닥쳐 왁자지껄한다.
관광버스로 강원도 강릉 어디선가 온 백두대간팀들이 서둘러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여원재의 행정구역상 정확한 위치는 전북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이다.
■ 여원재
여원치에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일반 여행객을 위하여 여원치에 '여원'이란 원(여관)을 설치하였다.
여관 건물을 원우(院宇)라 하였는데 이곳 여원 터에는 지금도 암벽에 마애여래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우는 사원(寺院)을 개조 혹은 전환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헌과 전설에 따른 여원재 골의 역사의 흔적은 많다. 먼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곳은 백제 지역인 남원과 신라 지역인 운봉에
산성을 쌓아 양국이 대치해 오던 국경지대이다.
백제는 초고왕 23년(188)과 무왕 3년(602), 무왕 17년(616)에 각각 신라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하였으며 백제 동성왕 6년(신라 소지왕 6년,
484)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이곳 모산성 아래에서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지리산 줄기가 멈춰선 주지산 서쪽에 위치한 주지암(住智庵)은 신라때 건립되었으며 정상에 신선이 와서 장기를 두었다는 장기바우가 있다.
이곳은 또한 영봉의 영험이 슬기로운 명산으로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기도단으로 유래가 깊은 곳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왕 6년(1380) 황산대첩시 안개가 자욱한 이 곳 여원치에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
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았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 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왼쪽
젖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한다.
후에 이성계는 이 백발 노파가 필시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노파를 만났던 고개의 석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산신각을
지어 보존케 하였다.
따라서 지리산 산신령은 보통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지리산 산신령이 사는 이곳을 여원치(여원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버스에서 내린 산우님들이 출발준비를 한다.
강원도에서 대형버스로 먼저 도착한 분들이 서둘러 출발준비를 재촉하고 있었다.
오늘 백두대간 제3구간(여원재-복성이재) 산행을 함께 한 산우님들이 운성대장군과 함께 사진 한장 남긴다.
이번 구간은 마을 임도도 경유하고 마을을 경유하고 해서 길을 잃어 버릴 위험이 많은 구간으로 소문이 나 있는 구간이다.
운성대장군님께 길을 잘 찾아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해 달라고 빌어본다.
여원재 버스 정류장에서 남원방향으로 20m 정도 올라가니 대간들머리가 보인다.
백두대간 리본이 많이 있고 (여원재 해발 480m, 유치 10.4㎞, 노치샘 6.6㎞를 가르키는)이정표가 서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숲 속으로 오르며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이 소나무 숲 사이로 진행을 하자 왼쪽 아래로 수 많은 무덤이 보인다.
곧이어 소나무 숲이 끝나자 밭이 나왔다.
5분여 진행을 하니 작은 밭이 가로막고 오른쪽으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갑자기
앞서간 강원도에서 오신 산우님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돌아온다.
"길이 아닙니까?"라고 묻자 "예, 여기서 논두렁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가야 한데요!!"라고 답한다.
하마터면 알바할 뻔 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자세히 보니 왼쪽 밭 사이로 올라타는 길에 대간리본이 걸려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 그냥 지나치면 정말 낭패를 볼만한 길이다. 휴!!! 알바 한번 면했다. 다 운성대장군님 덕분이다 ㅎ
배추밭 사이로 대간 리본이 하나 딸랑 보인다.
밭 사이로 진행하니 다시 마을 산을 오른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소나무 숲 사이로 진행을 하다 오르막을 올라서면 묘2기가 나타난다.
묘지를 지나 대간리본들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계속 진행한다.
대간길에서 만난 김해김씨 문중 묘. 대간길은 이곳을 지나쳐 곧바로 진행한다.
다시 계속 등선으로 들어가는길과 콘크리트길이 또 나왔다.
이곳은 타 산행후기를 읽었을 때 다른 대간팀들이 많이 알바한 곳이다.
다행히 우리는 곧바로 찾았다.
길이 갈라지던 지점 바로 전에 오른쪽으로 급하게 5시 방향으로 꺾여 내려서는 산을 깍은 길이 대간길이다.
휴!! 걱정했던 알바구간을 또 하나 넘겼다.
길은 다시 묘지 우측 소나무 숲 사이로 가파른 내리막으로 이어지고 약100m정도 내려오면 산판 도로가 나타난다.
우측으로 이어진 산판 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을 하다
고남산을 향에 힘겹게 오른다. 사방이 어둠속에 잠겨 있어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약간의 세찬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얼마 후 약간의 암릉구간이 나타난다.
흰 밧줄이 매어있는 암릉길을 힘겹게 오르니 어느덧 고남산 정상이다.(846m/06:20)
볼품없는 산정 앞에 중계탑이 흉물스럽게 육중한 몸을 들어내 보이고 있다. 사진기를 눌렀지만 어둠속이라 전체 모습을 담지 못했다.
고남산이다. 이곳 고남산에서의 조망이 너무나 멋지다고 하던데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인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남산 조망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함께 한 산우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고남산
여원재에서 2시간쯤 지나면 고남산이다. 높이도 846.5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다.
반야봉을 비롯하여 노고단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능선과 남원시가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입지적 특성은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한국통신의 중계탑이 대변한다. 괴기스러울 정도의 살풍경이다.
전파도 백두대간은 쉽게 넘지 못하는 모양인지, 광주의 무등산과 합천의 가야산이 이 산에 선 중계탑 덕분에 핸드폰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
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편리는 자연으로부터 꾸어온 것이다. 자연이 동의한 바 없으니 약탈인 셈이지만.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리었다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는데, 동행한 정도전이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했다는 데서 산 아랫마을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성계는 이 산 정상에서 전장의 지형지물을 샅샅이 살핀 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이상 글 윤제학·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고남산 정상에서는 바람이 엄청 세차게 분다.
하마터면 사진을 찍다가 뒤로 굴를 뻔도 했다. 휴!!!
고남산에서 통안재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는 산우님들의 모습이다.
고남산에서 하산하여 어둠 속에서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게 통안재를 지나 매요리 마을에 도착했다.
멀리 차량소리가 들리는 것 만으로 통안재를 지나 매요리에 가까워지는구나 느꼈을 뿐....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매요리 마을에 들어서니 낯선 산객들의 발짜욱 때문인가 동내 개들이 짖어댄다.
앞서가는 산우님 너머로 매요리마을 교회가 보인다. 진행하다가 오른쪽으로 내려가야 매요리 마을회관을 만난다.
매요리 마을회관.
아마도 새로 지은 마을회관인가 보다. 좌측 길 옆에 오래된 마을회관 건물이 별도로 있다.
마을회관 앞 자그마한 정자에서는 서너명의 대간꾼들이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려고 하고 있다.
이곳 남원 운봉 땅은 자료를 보면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여말에 이성계의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 뿐만이 아니라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북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이 싸움으로 동학혁명군 부대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김개남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영남으로 진출하려던 꿈을 접고 후퇴하고 만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렸다.
또한 운봉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다. 발성이 가볍고 소리의 꼬리가 긴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의 소리고, 무겁고 호쾌한 발성의 동편제는
백두대간의 이남 즉 전라도 동북 지역의 운봉에서 태어났다.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가왕(歌王) 송홍록(1780년 경-1863년 경)과 국창(國唱) 박초월(1916-1983)이 태어난 곳인 까닭이다.
매요마을휴게소.
이 휴게소 주인 아주머니가 대간 산꾼들에게는 엄청 유명하던데...
대다수 대간팀들이 이곳에서 쉬고 간단한 식사도 하고 떠나는 곳이란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이른 시간인가???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이 곳 주인 아주머니 입담도 대단하시다는데 ...
매요마을휴게소를 지나 대간길 입구에 걸려있는 백두대란 리본들...
얼마나 많은 대간꾼들이 이곳을 지나갔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 남은 대간길에는 이렇게 마을길을 지나는 구간은 더이상 없다는데....
매요마을휴게소를 지나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 내려가니 다시 오른쪽 산길로 올라간다.
앞선 산우들이 대간 능선길로 다시 접어들고 있다.
산능선을 올라 이어진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한 다음, 내리막 길을 따라 내려섰다.
나무를 켜는 굉음이 들려오는 공장(목공예품 생산공장)앞 삼거리(남원시 운봉읍과 장수군 번암면을 왕래하는 포장도로)인 유치(柳峙)에 도착한다.
유치마을로 내려서는 산우님들의 모습이다.
유치삼거리의 모습.
■ 남원 운봉이야기 하나 더
남원에는 2개의 큰 물줄기가 있는데, 그 분수령이 백두대간이다.
하나는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곡성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요천이고, 다른 하나는 운봉, 산내, 마천, 산청을 거쳐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만수천이다.
만수천의 발원지 덕산저수지 옆에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으로, 비가 와 왼쪽에 떨어지면 주천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으로 내리는 비는 운봉으로 흘러간다.
마을 가운데에서 물의 흐름이 갈라진다.
이 곳은 지난 번 2구간 때 우리가 지나온 노치샘이 있는 그 마을을 말한다.
마을의 몇 집은 주천면과 운봉읍의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주방이 있는 아래채는 운봉에 속하고, 안방은 주천면에 속한다.
아침은 운봉에서 먹고, 잠은 주천면에서 자는 희한한 풍경이 생긴다.
노치 마을에서 여원재, 고남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활문화권을 구별시키는 경계선이었다.
동쪽의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역사적으로 신라에 속했으나, 서쪽의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였다.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의 구분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백제였던 시내권은 전라 방언을 사용하지만, 신라였던 동부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곤 한다.
사용 어휘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시내에서는 ‘더워, 추워’라고 말하는 반면에 동부권에서는 ‘더버, 추버’라고 한다.
이것은 옛말 ‘다, 다’의 ‘’이 전라 방언에서는 ‘ㅇ’으로 변한 반면 경상방언에서는 ‘ㅂ’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유치삼거리에서 위쪽으로 진행하다 다시 오른쪽 산길로 올라탄다.
입구에 대간리본들이 대간방향을 나타내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정표(백두대간 유치삼거리(매요) 해발 420m, 여원재 10.4㎞, 복성이재 9.6㎞ 서부지방산림관리청)를 지나 숲 속으로 들어섰다.
이어진 대간길은 키큰 소나무 숲을 지나 진행이 된다.
산행로에 소나무잎이 쌓여 있어 그 느낌이 너무나 좋다. 웰빙산행이 따로 없다.
앞선 산우님들이 소나무 숲길을 산행하고 있다.
사치재로 가는 길에 만난 돌탑.
우리 민족은 무슨 한이 그리도 많아 이렇게 정성껏 돌을 하나 하나 쌓는지..
대간길에는 이렇게 이름 모를 돌 탑을 수없이 만날 수 있다.
무엇을 빌었을까????
나도 주변에 보이는 조그마한 돌 하나를 얹져놓고 무사산행을 잠시 기원해본다.
사치재 가기 전에 지난 묘지.
이번 구간은 마을과 가까운 산들을 많이 지나서인가 유난히 무덤들을 많이 지난다.
능선분기점인 618m봉을 지나 왼쪽 능선 길로 접어들어 진행을 하여 한참을 걸으니 자동차의 질주하는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온다.
88고속국도가 보이며 9시10분경 사치재를 알리는 이정표(백두대간 사치재 해발 500m, 여원재 12.9㎞, 복성이재 4.8㎞ 서부지방산림관리청)
에 도착했다.
사치재 이정표에서 함께한 산우님들..
이제 사치재를 내려가면 88고속도로를 만난다.
우리는 88고속도로를 가로지르지 않고 지하통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사치재 이정표를 지나 88고속도로로 내려서서 도로변을 따라 10여 미터 진행하면 지하통로 입구로 내려갈 수 있다.
앞선 산우님이 지하통로 방향으로 이동하시고 계시다.
일부 대간팀들은 이 88고속도로를 그냥 가로질러 건너편 대간능선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지하통로의 모습.
앞선 국화님의 모습을 담으려고 사진기를 눌렀는데 그만 후레쉬가 터지지 않아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통로 건너편에서는 먼저 도착한 산우님들이 식사를 하려고 준비하고 계시다.
당초에는 알바도 하지 않고 산행속도가 예정보다 빨라서 간단하게 행동식으로 하고 12시30분경 복성이재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하고 출발하려
고 하였으나 모 여산우님이 배가 고파서 더이상 못가겠다고 하신다.
미모를 자랑하시는 산우님의 뜻을 거슬를 수는 없고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ㅎㅎ
아침 9시 37분. 사치재에서 식사를 마치고 88고속도로 건너편 대간길로 다시 산행을 시작하시는 산우님들 모습.
지하통로에서 올라오면 바로 능선을 타고 오르는 대간길이 있다.
산불로 나무들이 타버렸나보다.
아마도 큰 산불이 있었는 듯...
지나온 사치재 방향을 잠시 돌아본다. 멀리 88고속도로가 보인다.
산불지역을 올라치는 산우님 모습.
ㄱ자 모습으로 꺽여진 소나무 사이로 능선을 올라치는 산우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곳은 대간꾼들에게 알려진 산불지역....
온통 주변 소나무들이 불아 타서 흉물스럽기만 하다.
아직도 시꺼먼 그을음이 남아 있는 나무들도 많다.
산불지대 불에 타버린 나무들의 모습
멀리 고남산(846.4m)이 보이고 발 아래 88고속국도상에 있는 지리산휴게소와 조형물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진행방향으로는 앞으로 가야 할 봉화산(919.8m)이 멀리 보이고 백두대간의 능선이 시원스럽게 뻗어있다.
운봉(雲峰)들
최 석 영
남원에서 운봉을 보면
지리연봉(地利連峯)은 울창한데
천왕봉 붓끝으로 수묵화를 쳤음인가
산등성 휘감는 구름 신비하고 절묘하니
지형 지세가 송나라 운봉과 같아서
지명을 운봉이라 부른다니 더더욱 놀랍구나
제비가 박 씨를 물고 넘어 보은한 고개는
세월에 녹은 노송이 낙조에 잠들고
땅 따먹기 하던 변방의 고갯마루
오욕의 역사를 담지 못해 말을 잊었구나
왜구야, 왜구야 오지를 마라.
너 이리로 오는 통에 위화도는 목을 매고
내 아버지에 아버지에 아버지는
굶어서 얼어서 총 맞아 죽었다.
두문동 32현 이름도 높다만
임진란이 얼마라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 태조의 전적비를 세웠느냐
오목장군의 충성은 가상 하나 지나고보니
덧없는 일이다. 아엾다 유린된 인내천아
너 아직도 유리걸식을 하는구나
잡초를 신세를 못 면하였구나.
피 바위야 왜구야 운봉을 비웃지 마라.
송나라 땅 운봉이 어떤지 모른다 만
전라도 땅 운봉은 옥보고를 품에 앉아
달빛에 거문고 가락을 풀어 먹이고
가슴에 맺힌 한은 사설이 되고
사설은 바디가 되어
판소리 동편제는 운봉땅 비전 마을에서
꽃을 피웠구나.
빨치산도 토벌대도 배를 채운 서러운 운봉아
네 목의 피가
저리도 고운 바래봉 철쭉을 피웠구나.
정령치 날아 오른 글라이딩은
호수같은 들녘을 구비 돌아 보았느냐.
주천(主川) 냇물을 한줄기 운봉으로
한줄기 남원으로 나누어 줬으니
운봉들 가로 지른 물 임천강 되고 진주 남강 메우고
남원에 흐른 물 광한루 휘돌아 섬진강 일굼은
네 삶이
반도를 품은 어미의 형상이기 때문 이련가.
세걸산 고리봉아 성삼재야
삼도(三道) 오개면(五個面)을 얼싸 앉은 운봉아
더이상 분열은 안되나니 너와 내가 하나 되고
동과 서가 얼싸 앉아야겠구나.
곡창의 풍요로움을 동편제의 호탕함에 담아
고원분지 넉넉함으로 대동장(大同場)터를 열어
분단된 조국 분열된 민족혼을 하나로 묶자. [인터넷 블로그에서 펌]
복성이재 가는 길에 만나는 산 능선들은 온통 억새 천국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행운이 아닌가???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와 그 길을 오르는 산우님들의 모습이 너무나 환상적인 조화이어서 앞서가는 산우님들을 불러 세웠다.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잡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지나 온 대간길을 되돌아 보았다.
함께한 산우님을 배경으로 추억 한장 남긴다.
저 멀리 고남산도 보이고 지나온 능선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앞서 가는 산우님들과 주변의 어루러진 수림이 너무나 조화롭다.
인간이 자연에 동화되어 어우러진 모습이 너무 감동스럽고 마침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흔들리는 들풀들과 억새의 모습이 환상 그 자체이다.
또 다시 앞서가는 산우님들을 불러 세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속에 산우님들이 뭍혀버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함께한 여 산우님들...
아막산성터로 진행하다 만난 아름다운 산행길...
이번 대간 길은 유난히도 소나무잎이 깔려 있는 산길이 많았다.
이번 대간길을 준비하면서 아막산성 이야기를 들어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산행내내 아막산성을 돌아볼려고 했는데 아마도 여기서 부터 아막산성터인 것 같다.
함께 하신 다니엘님이 아마 여기 인것 같다고 하신다.
한국의 산성은 자연적인 산세를 그대로 살려 쌓는다. 성 밑으로는 낭떨어지 직벽이다. 천연의 요새라는 생각이 든다.
자욱한 안개가 몰려오는 아막산성길을 따라 산우님들이 가고 있다.
저 능선 왼편으로는 아득한 낭떨어지이다.
그 옛날 백제 무왕의 군대가 신라 아막산성을 공격할 때에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까??
두 세기에 걸쳐 백제는 쉬지 않고 신라를 쳤다. 170년 소고왕은 신라로 쳐들어 갔으며, 188년,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에도 쳐들어갔다.
216년 구수왕 3년, 가을에 말갈이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했다. 왕은 굳센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사도성(沙道城)에서 싸워 물리쳤다.
모산성은 삼국사기에서 아막산성(阿莫山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운봉으로, 신라때 모산현 또는 ‘아영성(阿英城)·아막성’이라고도 적었다.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인 운봉의 옛이름은 지금도 땅이름에 널리 쓰이는 ‘아막’이란 말과 잇닿아‘아막골/아막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례 신문기사 펌]
아막산성을 내려가는 길에 만난 너덜지대...
이곳이 아막산성터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란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돌탑이 쌓여져 있다.
그들 나름대로의 소망을 작은 돌에 담아 한층 한층 쌓았다.
아막산성을 내려서서 만난 임도.
대간길은 임도 건너 다시 능선길을 오른다.
오후 1시 10분. 드디어 후미가 복성이재에 도착하였다.
약 10시간여의 이번 대간산행은 우려 했던 알바도 하지 않았고 다소 몸이 좋지 않은 산우님들은 계셨어도 아무 사고 없이 산행을 종료한다.
먼저 도착하신 산우님들이 복성이재에서 추억 한장 남겼다.
대간길을 처음 나선 산우님들도 계신데..
아무런 문제 없이 산행을 마치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
비록 고남산에서의 조망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사치재에서 아막산성에 이르는 구간에서 만난 아름다운 대간능선과 억새길은 이번 대간길이
가져다 준 행운이 아닐까?
함께하는 대간길에 같이 한 산우님들과 많은 격려를 보내주신 산우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다음 구간은 이제 지리산 권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덕유산을 향하여 나아간다.
복성이재에서 봉화산, 백운산, 영취산을 너머 무령고개에 이르는 대간길은 어떠한 흥분과 감동을 가져다 줄 지 벌써 부터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